[시니어신문=김선숙 기자] 사람에게 죽음은 숙명입니다.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맞이할 나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나라에선 1990년대 초반부터 각당복지재단을 중심으로 죽음준비교육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해하고, 슬픔을 치유하는 노력으로 시작해 주어진 삶을 더욱 풍요롭고 의미있게 살도록 돕습니다. 시니어신문도 ‘죽음’에 대한 화두를 던집니다. 글을 쓴 김선숙 기자는 30여년 동안 죽음준비교육 관련 활동에 헌신하고 있는 전문강사이자, 행복한노년문화연구소장, 각당복지재단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2007년 5월의 일이다. 아버지는 감기처럼 목이 쉰 상태에서 동네 가정의학과의원에서 한 달여 치료를 받았다. 호전이 되지 않자 이비인후과에서도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결국, 대형병원에 가시게 됐다. 그곳에서도 “혹시 모르니 조직검사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그 때 연세가 88세였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마음이 답답했다. 만약 조직검사를 해서, 그 결과 암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걱정이 됐다. 그래서 내심 조직검사를 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 뜻을 아버지께도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조직검사만 남겨둔 채 그럭저럭 지내셨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내가 주관한 ‘행복한노년문화연구소’ 개소식 때 축하 인사말씀을 직접 하시도록 권했다.

아버지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걱정하셨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축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것 말고는 모든 기관이 비교적 정상이었다. 힘이 들면 지팡이를 짚고 가실 때도 있었지만, 약수터에도 가시고, 친구들과 식사하는 것도 즐기셨다. 어머니를 돕는다며 당신이 손수 세탁도 하셨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목소리가 완전히 좋아지지 않는 것에 대해 늘 꺼림직하게 여기셨다. 아버지는 목소리 컨디션에 따라 그날의 희비가 엇갈렸다.

그러는 가운데, 아버지는 집안 문중 일이라든지, 제사 등 집안 대소사를 하나씩 정리하셨다. 그리고, 평소 입버릇처럼 “나는 지금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것 말고는 너무 행복하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셨다.

다른 데는 멀쩡한데 목소리가 쾌하지 않는 것에 대해, 목소리가 왜 그러는지 병명을 확실하게 알고 싶어 하셨다. 2008년 7월, 아버지는 큰딸에게 부탁해 대형병원에 가셨다. 드디어 조직검사를 받으셨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죽음과 함께 사셨던 것이다. 조직검사를 하기 전날에도 산에 다녀오셨다고 했다. 그런데, 검사하는 날부터 갑자기 환자가 되신 것이다. 나도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기에 아버지 문제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직검사를 하셨다는 말을 듣고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느낌이랄까.

아버지는 검사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호흡곤란으로 입원하셨다. 그 날부터 나를 제외한 온 가족이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병원생활을 하게 됐다. 입원 중이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아무 일 없게 해주세요’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감사하게도 아버지의 병은 조금씩 호전됐다. 8월 중순, 내가 병원으로 면회갔을 때는 면도도 하시고, 이야기도 잘 하셨다. 그날 아버지는 나에게 “그렇게 아프면 차라리 가는 것이 낫겠더라. 만약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일체 의료행위를 하지 말아라. 더 이상 회생가능성이 없을 때 단지 생명연장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네가 말하는 호스피스 케어를 받고 싶다”고 덧붙였다.

말하자면 존엄사, 자연사를 하시겠다는 결정이었다. 다행히 그 날 이후 몸이 많이 회복되시면서, 바로 6주간의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물론 조직검사부터 항암치료까지 아버지 본인이 결정하셨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살아있는 순간 최선을 다하셨다. 한편으론 돌아가실 준비를 하시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고자 하셨다. 아버지는 2008년 10월 6일, 자연사하셨다.

아버지는 병명도 모른 채 돌아가시는 것 보다, 차라리 병명이라도 알고 최선을 다해 치료 받기를 원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암과 더불어 살아도 좋으니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단다. 평소 건강하셨기에 그런 생각을 하셨으리라.

나는 아버지를 통해 많은 생각을 했다. 본인이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신의 병명 정도는 아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경우 ‘차라리 조직검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차라리 병명을 모르는 채 그대로 사셨더라면….

어찌 됐든 본인 스스로 자신의 병명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질병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능력에 따라 대처도 달라진다. 병명을 정직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다고 해서, 만약 죽음준비가 전혀 안 돼 있는 사람에게 병명을 알려 준다면 지레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다. ‘병명이 무엇인가?’를 알리기에 앞서 ‘어떻게 알리고, 환자와 함께 그 문제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심사숙고 해야 한다. <계속>